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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충돌' 4·29 폭동 극영화로…20주년인 내년에 개봉 목표, 데이비드 김 등 제작발표회

4.29 폭동을 주제로 한 극영화가 폭동 20주년인 내년 개봉을 목표로 제작에 착수했다. 28일 LA 한인타운에서 열린 영화 '컬러의 충돌(Clash of Colors)' 제작발표회에는 작품의 제작과 각본 작업을 맡은 데이비드 김 변호사 할리우드의 유명 작가 겸 프로듀서인 존 파나노 소설가 로니 켈러 등이 참석해 제작 예정인 영화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 밝혔다. 이들에 따르면 '컬러의 충돌'은 올 가을부터 LA인근에서 촬영에 착수 겨울 무렵 후반 작업을 마친 후 내년 4월경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제작비는 최소 1000만 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할리우드 진출을 모색 중인 한국 배우와 감독 메이저 진출을 꿈꾸는 코리안 아메리칸 영화인들도 '컬러의 충돌' 제작에 함께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8년 동명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 발표했던 데이비드 김 변호사는 그간 조사해 온 폭동 당시의 정황과 그에 얽힌 각종 권력관계를 밑바탕으로 극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두 한국인 형제의 눈을 통해 지역정치권과 언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희생양이 돼야 했던 폭동 당시 한인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그렸다. 한인 남성과 흑인 여성 간의 사랑 이야기도 곁들여 주류 관객층에게도 어필할 수 있도록 했다. 김 변호사는 "4.29에 관한 진실과 그 의미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다큐멘터리보다 극영화가 효과적이라고 판단 이번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됐다"며 "단순한 재미를 넘어 화해와 통합의 교훈적 메시지까지 전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우리 커뮤니티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후세에도 남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뜻깊은 영화 제작에 많은 한인들의 지지와 관심을 바란다"고도 덧붙였다. 제작자 겸 작가인 존 파나노 프로듀서는 "영화를 통해 4.29 폭동 당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은 물론 그 때의 오해를 풀고 당시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제작의도를 설명했다. ▶문의: DDK프로덕션 (213)389-0948 오늘 4·29 폭동 19주년 행사 4.29 LA폭동 19주년을 기리는 각종 행사가 열린다. 한미연합회(KAC)는 오늘(29일) 오후 6시 '4.29 폭동 기념 에세이 콘테스트' 시상식을 연다. 1000달러의 장학금이 주어지는 대상 1명을 비롯해 1~3등 수상자를 발표한다. KAC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4.29 폭동에 대한 이해와 생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 에세이 작성과 함께 4.29 폭동을 직접 겪은 한인을 인터뷰하도록 했었다. ▶문의:(213)365-5999 한인타운노동연대(KIWA)는 이날 오후 6시부터 LA한인타운 윌셔 크리스찬교회(634 S. Normandie Ave)에서 창립 19주년 기념 행사를 갖는다. 행사 주제는 '되찾아야할 코리아타운'이다. ▶문의:(213)738-9050 한편 이날 오후 12시30분부터는 버몬트와 4가 인근 샤토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인종화합 권투경기가 열린다. 이경민·이재희 기자 rachel@koreadaily.com

2011-04-28

'4·29 폭동' 때 반신불수, LA소방국 밀러씨의 '기적'

그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큰 폭발음이 머리를 뒤흔들더니 총알이 스캇 밀러(사진) 소방관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검은 연기로 뒤덮인 도시. 웨스턴가로 불을 끄기 위해 출동한 LA소방국 소방차가 길거리 트럭 옆에 정차하는 순간 트럭 운전기사는 방아쇠를 당겼다. 1992년 4.29 LA 폭동은 그렇게 한 소방관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총알은 턱을 관통해 목에서 뇌로 올라가는 혈관인 경동맥을 망가뜨렸다. 솟구치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밀러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믿었던 동료들 '다시는 걷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린 의사. 모두가 운명처럼 이 순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7년. 밀러 소방관은 다시 소방국으로 돌아왔다. 화재 예방부서의 건물 화재 검사관이 된 그는 예전처럼 현장에 투입되어 시민들을 직접 구하지 못해도 한걸음 뒤에서 화재를 사전에 차단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LA타임스는 4일 한인 커뮤니티만의 아픈 기억인 줄 알았던 LA폭동으로 인생이 바뀐 소방관의 이야기를 조용히 보도했다. 총에 맞아 쓰러졌을 당시를 회상하던 밀러 소방관의 눈가가 흐려졌다.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눈 앞으로 3살배기 딸과 5살 아들을 안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대로 가족들을 남겨둔 채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시더 시나이 메디컬 센터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밀러 소방관은 정신의 마지막 끈을 놓치 않고 숨을 고르게 내쉬려 안간힘을 썼다. 턱을 6인치나 절개하고 총알을 뽑아내고 나서야 밀러 소방관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뇌의 손상으로 인해 몸의 왼쪽 부분이 마비되는 반신불수가 됐고 더불어 말을 하지 못하는 언어장애까지 얻게 됐다. 9주 간의 지옥같은 병원생활. 희망을 잃을 법도 했지만 밀러는 다시 일어서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의 의지력과 인내심이 마술을 부린걸까.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 의사의 말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밀러의 왼손과 왼발이 감각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화재 예방부 건물 화재 검사관으로 당당히 소방국에 복귀했다. "기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아닌가요?" 밀러의 사고를 곁에서 목격한 동료 소방관 폴 조단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배은경 기자ekbae@koreadaily.com

2009-05-04

4·29 폭동 17주년, 한인타운 재난에 대비 민·관 응급 구조팀 창설

LA한인타운의 각종 재해에 대비한 민·관 합동 응급 구조팀이 창설됐다. 응급 구조팀에는 한인단체와 LA시의 경찰국과 소방국 등이 참여한다. 특히 구조팀은 LA폭동 17주년을 맞아 공식 발족식을 갖게 돼 의미를 더하고 있다. LA한인회(회장 스칼렛 엄)는 오늘(29일) 오후 5시 30분 버몬트와 11가에 있는 올림픽경찰서에서 ‘한인타운 비상대책팀(OCERT·Olympic Community Emergency Response Team)’의 발족식을 갖는다. OCERT는 올림픽경찰서 관할 구역의 지진·테러·폭동 등에 대비해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응급 커뮤니케이션팀과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응급 필드서포트팀, 음식이나 장비를 지원하는 응급 로지스틱팀으로 구성된다. OCERT에는 LA시 재난대책국과 수도전력국도 참여하며 LA한인회와 LA총영사관, 재미한인자원봉사자회(PAVA), 한미연합회(KAC)등 한인 60여명을 포함 총200여명의 자원 봉사자가 활동하게 된다. LA한인회의 이창엽 이사장은 “지난 92년 폭동 이후 커뮤니티 차원에서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며 “OCERT는 공공기관과의 긴밀한 상호 협력을 통해 각종 재난이나 재해 속에서 우리 커뮤니티를 우리 손으로 지키자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또 “커뮤니티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나서 이런 훌륭한 시스템이 구축된 것은 처음”이라며 “앞으로 더 많은 한인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재해 대비 트레이닝을 마친 OCERT의 자원봉사자들은 연 2회에 걸쳐 실전 훈련을 받게 되며 올림픽경찰서 커뮤니티룸은 OCERT 대책 본부로 활용될 예정이다. ▷문의: (323)732-0700 LA한인회 곽재민 기자 jmkwak@koreadaily.com

2009-04-28

'4·29 폭동'이 나를 바꿨다…'나도 한인' 정체성 확인하는 계기

‘그날’ 이후 17년이 흘렀다. 전쟁터나 다름없었던 1992년 4월29일의 LA. 한인들은 눈물을 빼면 남는 건 잿더미 밖엔 없었다. 어떤 가장은 불 타 버린 가게 앞에서 땅을 쳐야했고, 모친은 주검으로 변한 자식을 껴안고 통곡했다. 억울함에 당사자들은 울분했고, 무력감에 한인사회는 공분했다. 그 벌건 흉터를 기억하자고 매해 오늘만 되면 되새김질 해오길 열 일곱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아픔은 어느덧 서서히 박제가 되어 가고 있다. 이맘 때면 수십명에게 장학금이 지급되고 경쟁이라도 하듯 단체들이 행사를 열고 있지만 일년에 한번 숙제로 끝날 뿐이다. 그날의 슬픔은 이제 사진으로만 남게되는 걸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슬픔은 다른 곳에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당시 10대의 나이로 부모의 눈물과 한숨을 목격한 자녀들이 그 주역이다. 아직 어려 분을 삭히기만 했던 그들은 ‘크면 힘없는 한인이 되진 않겠다’고 다짐했고 삶의 목표를 바꿨다. 이제 30대가 된 그들은 경찰관으로, 정치인 보좌관으로, 공무원으로 스스로의 다짐을 실천해나가고 있다. 역사속 4·29는 그들을 바꿨지만 ‘정의’와 ‘권익’이라는 목표가 있는 한 앞으로의 4·29는 그들이 바꿔나갈 것임은 분명하다. 그들에게 폭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니, 미래형이다. '나도 한인' 정체성 확인하는 계기 "한인사회의 존재를 알게 됐죠." LA커뮤니티재개발국(CRA)의 커뮤니티 어페어 스페셜리스트 홍연아씨는 '나도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당시 홍씨는 인디애나주 퍼듀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폭동 소식도 흑인 친구를 통해 처음 접했다. "충격이었죠. 한인들과 타인종간의 갈등이 그렇게 심한줄 몰랐어요. 1.5세로 한인사회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처음으로 고민하게 되었죠." 이후 가족과 남가주로 이주하면서 고민은 현실이 됐다. 친구들은 주류 기업 쪽으로 취업을 했지만 홍씨는 한인건강정보센터 LA교육구 CRA 등 비영리단체와 정부기관에서 줄곧 일하고 있다.홍씨는 정부기관에 몸담으며 한인사회와 정부기관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4.29 폭동을 계기로 한인사회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했기 때문. "아직도 할일이 많다고 느낀다"는 홍씨는 "정부의 각종 프로그램이나 사업에 한인사회의 목소리와 이익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씨는 이어 "현재 맡고 있는 업무가 각 커뮤니티 관련 일인만큼 한인사회가 흑인 커뮤니티를 비롯 다른 커뮤니티와 서로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기원 기자

2009-04-28

'4·29 폭동'이 나를 바꿨다…1세대의 이민생활 더 이해하게 돼

"역설적이지만 부모님 세대를 이해하는 촉매가 됐어요." 지금은 케드렌(Kedren) 병원에서 디렉터로 일하고 데이비드 류(34)씨는 얼마전까지 이반 버크 LA카운티 수퍼바이저의 보좌관으로 맹활약 했다. 당시 류씨는 LA인근 고등학교의 12학년 학생이었다. 류씨는 "사실 뉴스를 통해서나 주변 친구를 통해서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지만 TV를 통해 본 상황들만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후 류씨는 UCLA에 진학해 한인학생회 회장을 맡으면서 선배들을 통해 LA폭동의 발생 배경을 접하게 됐다. 류씨는 "1세들이 미국에 이민와서 생존을 위해 얼마나 힘겹게 생활했는지 아는 계기가 됐다"며 "자신들이 일군 비즈니스와 한인커뮤니티를 지키기 위해 폭도들이 날뛰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현장을 지킬 수 밖에 없었던 그 마음들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류씨는 이제 한인사회의 힘도 LA폭동 당시와 비교해 엄청나게 커졌다고 단언한다. "예전과 달리 한인들도 주류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류씨는 "타커뮤니티와의 화합 등에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류씨는 앞으로도 커뮤니티 봉사와 공공서비스를 통해 많은 한인들을 돕는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장열 기자

2009-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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